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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클레멘스 9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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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클레멘스 9세는 1600년 이탈리아에서 태어나, 시인이자 극작가로 활동하며 종교적인 주제의 연극으로 인기를 얻었다. 교황 알렉산데르 7세에 의해 추기경이 된 후, 1667년 교황으로 선출되었다. 교황 재위 기간 동안 얀센파와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대처해야 했으며, 베네치아를 돕기 위해 노력했으나 크레타 섬은 함락되었다. 그는 세금을 감면하고 빈민에게 자선을 베푸는 등 신자들의 영적 생활에 힘썼으며, 외교적으로 프랑스와 스페인을 화해시켰다. 또한 바로크 예술가인 잔 로렌초 베르니니에게 산탄젤로 다리 장식을 의뢰하는 등 예술을 후원했다. 클레멘스 9세는 1669년 뇌졸중으로 사망했으며, 후임 교황 클레멘스 10세는 그를 위해 무덤을 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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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클레멘스 9세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카를로 마라타 - 교황 클레멘스 9세의 초상
카를로 마라타의 초상, 1669년
이름클레멘스 9세
본명줄리오 로스필리오시
출생일1600년 1월 28일
출생지토스카나 대공국, 피스토이아
사망일1669년 12월 9일
사망지교황령, 로마
모토"Aliis non sibi Clemens" ("자신에게는 엄격하고 타인에게는 관대하게")
교황 관련 정보
교황 즉위 시작1667년 6월 20일
교황 즉위 종료1669년 12월 9일
선임 교황알렉산데르 7세
후임 교황클레멘스 10세
서명
성직 정보
종교가톨릭교회
서품해당 정보 없음
서품자해당 정보 없음
주교 서임일1644년 3월 29일
주교 서임자안토니오 마르첼로 바르베리니
추기경 서임일1657년 4월 9일
추기경 서임자알렉산데르 7세
이전 직책사도적 서명 법정 감사관 (1632–1636)
성사 의식 성 Конгрегация 사무총장 (1632–1636)
스페인 교황 대사 (1644–1653)
타르수스 대주교 (1644–1667)
로마 교황청 관리 (1653–1655)
국무원 추기경 (1655–1667)
로마 총독 (1655)
산 시스토 베키오 추기경 (1657–1667)

2. 생애

1600년 이탈리아 피스토이아에서 태어난 교황 클레멘스 9세는 로마에서 예수회의 지도를 받은 후 피사 대학교에서 공부했다. 다재다능한 그는 시인이자 극작가로, 종교적인 주제로 된 그의 연극들은 대단히 인기가 있었다.

1644년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에스파냐 교황청 사절 겸 타르수스의 명의 대주교가 되었고, 1657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에 의해 추기경과 교황청 국무성성 장관이 되었다.

교황이 된 후, 얀센주의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대처해야 했다. 프랑스 교회는 얀센파 주교들이 교황청의 뜻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했으나 실패했다.

1645년부터 크레타섬을 점령한 오스만 제국은 칸디아를 공격했고, 클레멘스 9세는 베네치아를 지원했으나 루이 14세의 도움을 받지 못해 1669년 9월 5일 칸디아가 함락되었다.

클레멘스 9세는 세금을 줄이고 빈민들에게 자선을 베풀었으며, 스웨덴여왕 크리스티나를 받아들였다. 프랑스와 에스파냐를 화해시키는 등 외교적 노력도 기울였다.

문화적으로는 바로크 예술가 잔 로렌초 베르니니에게 Ponte Sant'Angelo영어의 장식을 의뢰, 10체의 천사조각으로 다리를 장식했다.[7][8]

1669년 10월 뇌졸중으로 쓰러져 그 해 12월 9일 사망했다.

2. 1. 초기 생애와 교육

줄리오 로스피글리오시는 1600년 이탈리아피스토이아의 귀족 로스피글리오시 가문에서 자코모와 카테리나 로스피글리오시 사이에서 태어났다.[6] 로마에서 예수회의 지도를 받은 후 피사 대학교에서 1623년 신학, 철학, 교회법 및 민법 박사 학위를 받았다.[6] 1623년부터 1625년까지 피사 대학교에서 신학 교수로 재직했다.

그는 다재다능한 시인이자 극작가로, 종교적인 주제로 된 그의 연극들은 대단히 인기가 있었다. 오페라의 대본 작가이기도 하며, 종교 오페라 형식을 창출하고, 최초의 희극 오페라(코믹 오페라) 『고통받는 자에게 복이 있으라』는 1639년 2월 27일에 초연되었으며, 그 외에도 최초의 코믹 오페라 대본을 몇 편 제작했다.[6]

젊은 시절 우르바노 8세와 그의 가문인 바르베리니 가문에 발탁되었다.[6]

2. 2. 외교관 및 추기경 시절

1644년 교황 우르바노 8세에 의해 에스파냐 교황청 사절 겸 타르수스의 명의 대주교가 된 후, 1657년 교황 알렉산데르 7세에 의해 추기경과 교황청 국무성성 장관이 되었다.[1]

로스피글리오시는 교황 우르바노 8세 (1623–1644)와 긴밀히 협력하며, 교황청의 레페렌다리우스로서 외교 부서에서 활동했다. 1644년 타르수스 명의 대주교로 임명되었으며, 이후 바티칸에서 주교 서품을 받았다. 1644년부터 1653년까지 스페인 주재 교황 대사로 봉사하다가 은퇴했다. 그는 전임자와 연관된 사람들을 싫어하고 멀리했던 교황 인노첸시오 10세의 교황 재위 기간 동안 은퇴 생활을 했다.[1] 또한 로마의 산타 마리아 마조레의 부제가 되었다.

교황 알렉산데르 7세는 1657년 그를 산 시스토 베키오의 추기경 사제로 임명했으며, 1655년에는 국무원으로 임명되어 1667년까지 그 직을 유지했다.[1]

2. 3. 교황 선출

교황 알렉산데르 7세1667년에 사망하자 그의 후임자를 선출하기 위한 콘클라베가 소집되었다. 프랑스루이 14세는 프랑스 파벌에게 로스피글리오시를 지지하도록 지시했으며, 그가 한때 스페인 주재 교황 대사를 지냈다는 사실 때문에 카를 2세의 스페인 파벌도 달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1667년 6월 20일, 그는 교황으로 선출되었고 "클레멘스 9세"라는 교황명을 사용했다.[4]

새 교황은 1667년 6월 26일 수석 부제이자 추기경인 리날도 데스테 추기경에 의해 교황 대관식을 거행했다. 그는 나중에 1667년 7월 3일 성 요한 대성전을 차지했다.

로스피글리오시가 교황이 된 것에 대해 프란체스코 알비치 추기경은 "우르바노는 교황청을 은행으로 만들었고, 인노첸시오는 사창가로, 알렉산데르는 선술집으로 만들었으며, 이 사람은 연극 무대로 만들 것이다"라고 말했다. 알비치는 또한 로스피글리오시의 음악에 대한 열정을 언급하며 "그는 유럽의 모든 거세된 가수들에게 모자를 씌워 성직 추기경단을 거세할 것이다!"라고 말했다.[4] 로스피글리오시는 선출되었을 때 자신과 네리 코르시니 추기경이 플라비오 키지 추기경에게 투표했기 때문에 두 표를 제외한 모든 표를 받았다.

그는 토스카나 대공국 출신으로, 피스토이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6] 학식이 풍부했던 교황 우르바노 8세 주변에 모인 문인 중 한 명이었다.[7] 그는 오페라의 대본 작가이기도 하며, 종교 오페라 형식을 창출하고, 최초의 희극 오페라(코믹 오페라) 『고통받는 자에게 복이 있으라』는 1639년 2월 27일에 초연되었으며, 그 외에도 최초의 코믹 오페라 대본을 몇 편 제작했다.[6]

젊은 나이에 우르바노 8세와 그의 생가인 바르베리니 가문에 눈에 띄어[6] 로마 총독, 교황 사절, 국무 장관 등을 역임하고, 1657년추기경으로 승진했다. 교황 취임은 1667년의 일이다.

3. 교황 재위 기간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된 클레멘스 9세는 재임 기간 동안 얀센주의 논쟁,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외교 및 예술 후원 등 다양한 분야에서 활동했다.

클레멘스 9세는 세금을 줄이고 빈민들에게 자선을 베풀었으며, 신자들의 영적 생활과 선교에 힘썼다.[1] 또한 전임 교황처럼 스웨덴의 크리스티나 여왕을 받아들였다.[1]

문화적으로는 바로크 예술의 거장 잔 로렌초 베르니니에게 산탄젤로 다리 장식을 의뢰하여, 베르니니가 직접 제작한 2점을 포함한 10점의 천사조각으로 다리를 장식했다.[7][8]

클레멘스 9세는 칸디아 함락 후 1669년 10월에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그해 12월 9일 사망했다.[7]

클레멘스 9세의 묘

3. 1. 얀센주의 논쟁 중재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뒤를 이어 교황이 된 클레멘스 9세는 얀센파 문제에 직면해야 했다. 얀센파에 가담한 주교들은 전임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프랑스 교회는 교회의 분열을 염려하여 그 주교들이 교황청의 뜻을 받아들이도록 설득하였으나 실패하였다.[1]

클레멘스 9세는 전임 알렉산데르 7세와는 달리 스페인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프랑스와도 어느 정도 잘 지내려 노력했고, 오랫동안 악습이었던 교황청족벌주의 폐지에 힘썼으며, 얀센주의 논쟁에 일단락을 지었다.[6]

알렉산데르 7세 시대에 일어난 교황군과 프랑스 대사를 둘러싼 소동으로 인해,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 (태양왕)는 로마 교황청에 사죄를 요구하고, 교황군 병사의 죄를 잊지 않기 위한 기념비를 건립하게 했지만, 클레멘스 9세는 그 비석 철거에 성공했다.[6] 그러나 갈리카니즘 문제나 수녀에 대한 대응을 놓고 프랑스 주교단과 로마 교황청 사이에 균열이 생겼으며, 이 문제는 후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루이 14세는 이처럼 자국 교회 문제에 대해서는 스스로 지시를 내리는 자세를 바꾸지 않았고, 유럽에서의 프랑스 우위의 정세로 인해 교황의 세속 지배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6]

3. 2.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

1645년 이래 오스만 제국크레타섬을 점령하고 그 섬의 마지막 기독교 왕국 칸디아를 무력화시키려 하였다.[6] 클레멘스 9세는 칸디아 방어를 담당했던 베네치아 공화국 군대의 구원 요청에 따라, 포위된 베네치아인들을 돕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6] 그러나 루이 14세의 도움을 받을 수 없었으므로, 1669년 9월 5일 칸디아는 함락되었다.[6]

3. 3. 외교 정책

클레멘스 9세는 교황이 되자 얀센주의 문제와 오스만 제국의 공격에 대처해야 했다. 얀센파에 가담한 프랑스 주교들은 전임 교황 알렉산데르 7세의 권고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프랑스 교회는 분열을 염려하여 이들을 설득했으나 실패했다.[1]

1645년 이래 크레타섬을 점령한 오스만 제국은 섬의 마지막 기독교 왕국 칸디아를 공격했다. 클레멘스 9세는 칸디아를 방어하던 베네치아 공화국을 돕기 위해 노력했으나, 루이 14세의 도움을 받지 못해 1669년 9월 5일 칸디아가 함락되었다.[1]

클레멘스 9세는 프랑스스페인을 화해시키는 등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다.[1] 전임 교황 알렉산데르 7세 시대에 발생한 프랑스 대사 관련 문제로, 루이 14세는 교황청에 사죄를 요구하고 기념비를 세우게 했지만, 클레멘스 9세는 이 비석 철거에 성공했다. 그러나 갈리카니즘 문제 등으로 프랑스 주교단과 교황청 사이에 균열이 생겼고, 이는 이후 오랫동안 영향을 미쳤다. 루이 14세는 자국 교회 문제에 대해 스스로 지시하는 태도를 바꾸지 않았고, 유럽에서 프랑스의 우위로 인해 교황의 세속 지배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6]

3. 4. 예술 후원

교황 클레멘스 9세는 예술에 대한 깊은 관심을 이어갔다. 그는 잔 로렌초 베르니니에게 산탄젤로 다리의 천사상과 성 베드로 대성당의 회랑을 의뢰하여 로마 시를 아름답게 장식했다.[7] 당시 교황으로서는 특이하게도 자신이 건설한 기념물에 자신의 이름을 새기지 않았다.

1668년 카니발 축제를 위해 시스티나 성가대의 안토니오 마리아 아바티니에게 자신의 자유로운 이탈리아어 번역의 스페인어 종교 드라마 ''La Baltasara''를 작곡하도록 의뢰했고, 이 작품의 세트는 베르니니가 디자인했다.

클레멘스 9세는 바로크 예술의 거장인 베르니니에게 Ponte Sant'Angelo영어 (산탄젤로 다리)의 장식을 의뢰했는데, 다리는 베르니니가 직접 제작한 2체를 포함한 10체의 천사조각으로 장식되었다.[7][8]

4. 사망

클레멘스 9세는 1669년 12월 9일 로마에서 사망했는데, 심장병으로 사망했다는 설이 있다.[5] 그의 후임자인 교황 클레멘스 10세(재위 1670–1676)는 산타 마리아 마조레 대성전에 그를 위한 화려한 무덤을 지었다.

1669년 가을 내내 탈장과 신장 결석으로 심각하게 앓았다. 질병과 크레타 섬에서의 터키군의 진격에 대한 불안감에도 불구하고, 7개의 로마 바실리카로 순례 여행을 갔지만, 그날 밤 심한 뇌졸중이 발생했다.[5] 그는 사망하기 불과 열흘 전인 11월 29일에 7명의 새로운 추기경을 임명하고, 한 명을 "인 펙토레"로 남겨두었다고 발표했다. 그러나 죽어가는 교황은 다음 콘클라베에서 자신의 정책을 옹호하기 위해 자신의 조카를 위한 "파벌"을 만들려고 했다.[5] 클레멘스 9세는 12월 9일 뇌졸중으로 사망했는데, 이는 베네치아군이 크레타 섬에서 패배하고 추방되었다는 소식을 접한 것이 원인일 수 있다는 믿음이 있다.[5]

사망 후 며칠 뒤, 로마의 피렌체 요원은 페르디난도 2세 데 메디치 대공에게 편지를 써서, 클레멘스 9세가 간질 환자라는 사실을 숨겼다고 비난했다. 당시 교회법에 따르면 간질 환자는 어떤 교회 직무도 수행할 자격이 없었지만, 이는 결코 증명되지 않았다.[4]

5. 평가

토스카나 대공국 출신으로, 피스토이아의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다.[6] 학식이 풍부했던 교황 우르바노 8세 주변에 모인 문인 중 한 명이었다.[7] 그는 오페라의 대본 작가이기도 하며, 종교 오페라 형식을 창출하고, 최초의 희극 오페라(코믹 오페라) 『고통받는 자에게 복이 있으라』는 1639년 2월 27일에 초연되었으며, 그 외에도 최초의 코믹 오페라 대본을 몇 편 제작했다.[6]

젊은 나이에 우르바노 8세와 그의 생가인 바르베리니 가문에 눈에 띄어[6] 로마 총독, 교황 사절, 국무 장관 등을 역임하고, 1657년추기경으로 승진했다. 교황 취임은 1667년의 일이다.

그 짧은 재위 기간 동안, 전임 알렉산데르 7세와는 달리 스페인과의 우호 관계를 유지하면서 프랑스와도 어느 정도 잘 지내려 노력했고, 오랫동안 악습이었던 교황청족벌주의 폐지에 힘썼으며, 얀센주의 논쟁에 일단락을 지었다.[6]

알렉산데르 7세 시대에 일어난 교황군과 프랑스 대사를 둘러싼 소동으로 인해, 프랑스 국왕 루이 14세 (태양왕)는 로마 교황청에 사죄를 요구하고, 교황군 병사의 죄를 잊지 않기 위한 기념비를 건립하게 했지만, 클레멘스 9세는 그 비석 철거에 성공했다.[6] 그러나 갈리카니즘 문제나 수녀에 대한 대응을 놓고 프랑스 주교단과 로마 교황청 사이에 균열이 생겼으며, 이 문제는 후에 오랫동안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루이 14세는 이처럼 자국 교회 문제에 대해서는 스스로 지시를 내리는 자세를 바꾸지 않았고, 유럽에서의 프랑스 우위의 정세로 인해 교황의 세속 지배는 약화될 수밖에 없었다.[6]

에게해에 떠 있는 섬, 크레타 섬(현 그리스)의 기독교 세력의 마지막 보루였던 칸디아(현 이라클리온)는 1645년 이후 오스만 제국의 공격을 받았는데, 칸디아 방어를 담당했던 베네치아 공화국 군대가 구원을 요청했을 때, 클레멘스 9세는 루이 14세로부터의 원조를 얻는 데 실패했고, 1669년 9월 5일, 칸디아가 함락되었다.

문화면에서는 바로크 예술의 거장이자 옛 친구인 잔 로렌초 베르니니에게 Ponte Sant'Angelo영어의 장식을 의뢰했고, 다리는 베르니니가 직접 제작한 2체를 포함한 10체의 천사조각으로 장식되었다.[7][8]

클레멘스 9세는 칸디아 함락 후 1669년 10월에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그 해 12월 9일 사망했다.

참조

[1] 웹사이트 Loughlin, James. "Pope Clement IX". ''The Catholic Encyclopedia''. Vol. 4. New York: Robert Appleton Company, 1908. 9 Sept. 2014 http://www.newadvent[...]
[2] 서적 The Oxford illustrated history of opera Oxford University Press 1994
[3] 간행물 Mazzocchi, Virgilio Grove Music Online. Oxford Music Online. Oxford University Press 2016-07-06
[4] 웹사이트 Pope Clement IX: Proceedings of the Conclave that led to his election https://www.pickle-p[...] Pickle Publishing 2022-03-07
[5] 웹사이트 Sede Vacante 1669-1670 http://www.csun.edu/[...] CSUN 2022-03-07
[6] 문서 マックスウェル・スチュアート(1999)pp.249-250
[7] 문서 『ラルース 図説 世界人物百科II』(2004)pp.260-262
[8] 문서 ベルニーニは教皇ウルバヌス8世にサン・ピエトロ大聖堂の大改装を任された大芸術家であった。[[#ラルース2|『ラルース 図説 世界人物百科II』(2004)pp.260-2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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